9고수.jpg

영화 ‘상의원’(감독 이원석)에서 상의원(尙衣院) 어침장 임돌석은 “옷에는 예의와 법도 그리고 계급이 있어야 하는 것일세”라고 말한다. 상의원은 조선시대 왕실의 옷을 만들던 공간. 어침장은 상의원의 수장으로 요즘 표현으로 왕과 왕비의 전속 의상디자이너다.

이공진은 반발한다. “사람이라면 늘 편안하고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것 아닙니까”" 임돌석이 정통 코스를 밟은 엘리트 디자이너라면, 이공진은 파격을 즐기는 이단아다.

이공진은 자유롭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옷을 만든다. 저고리의 길이를 줄이고 치마는 항아리 모양으로 풍성하게 만든다. 배래(저고리 소매 밑 부분)를 길게 늘어뜨릴수록 기품 있는 옷차림이라는 통념에 맞서 팔에 딱 맞는 길이로 배래를 줄여 몸매를 부각하는 게 그의 방식이다. 어침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느질을 단 하룻밤 만에 해내는 천재이기도 하다.

배우 고수(36)에게는 늘 ‘착하다’, ‘모범생같다’는 이미지가 쫓아다닌다.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 덕에 그는 데뷔 초 드라마에서 정직하고 건실한 청년을 주로 연기했다. 1999년 한 자양강장제 CF에서 '지킬 건 지킨다'며 여자친구 손을 잡고 뛰던 모습이 바로 대중이 ‘언제나처럼’ 생각하는 고수다.

이미지와는 달리 고수가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하나의 범주에 묶이지 않는다. 무능한 남편, 까칠한 소방관, 냉정한 군인 등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다양했다. 스릴러, 전쟁물, 로맨스,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에도 도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수의 ‘이미지’는 바뀌지 않았다.

고수는 상의원에서 이공진을 연기한다. 그러니까 이 선택은 가장 극적인 결정이라는 것이다. ‘착한’ ‘정직한’ ‘건실한’ 등의 수식어에 갇힌 배우가 ‘자유로운 영혼’ ‘천재’라는 말로 설명되는 캐릭터를 맡았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이공진은 고수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다.

“걱정이 많았어요. 지금까지 보여드리지 않았던 모습이니까요. 주변에서도 그러더라고요. ‘고수가 이공진을 연기한다고?’(웃음) 저에게 특정 이미지가 있다는 건 제가 제일 잘 압니다. 그 틀을 벗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고수가 ‘상의원’을 선택한 데는 한 가지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의원이라는 공간은 한국영화가 한 번도 다루지 않은 소재여서 흥미로웠다. 한석규와 연기한다는 점도 솔깃했다. 그리고 그는 십 수 년을 연기하면서 단 한 번도 사극에 출연하지 않았다. ‘상의원’의 모든 게 고수에게는 도전이었다.

“이미지가 그래서 그렇지 저도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제가 배우라는 직업을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전 일하면서도 항상 자유로워지려고 해요.”

공진은 ‘천재’다.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는 인물이다. 젊은 공진의 실력은 인생 전부를 바느질에 바친 돌석의 능력을 넘어선다. 고수도 처음에는 공진을 천재로 접근했다. 그런데 ‘천재’라는 말이 공진으로의 감정이입을 방해했다. 공진을 처음부터 다시 이해해야 했다.

“천재라기보다는 그저 다른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어요. 괴짜와는 조금 다릅니다. 공진을 자유로운 인물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그가 자유로운 건 바로 신분, 권력, 배경 같은 것에 있어서 그렇죠. 사람을 먼저 본다는 겁니다. 사람을 보니까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옷을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이죠.”

공진은 아마 고수가 연기한 인물 중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일 것이다. ‘상의원’은 두 가지 이야기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돌석과 공진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뮤즈(왕비)를 만난 예술가 돌석의 이야기다.

공진과 돌석 사이에는 질투와 존경, 경쟁심과 동료애의 감정이 뒤섞여 있다. 공진은 왕비에게 뮤즈를 찾은 환희와 사랑 받지 못하는 여인에 대한 안타까움, 아름다운 이성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느낀다.

“맞아요. 그런 감정이 모두 녹아들어 있어요. 철저히 돌석이 되지 않으면 연기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죽지 않고,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해야 했죠. 그런데 공진의 계급이 다른 인물들에 비해 낮은 축에 속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움츠려들더라고요.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어요.”

 “옷에는 예의와 법도 그리고 계급이 있어야 하는 것일세.” “사람이라면 늘 편안하고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것 아닙니까.”

공진과 돌석은 옷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두고 대립한다. 흡사 좁게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하고, 넓게는 세계에 대해 논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연기는 어떨까. 고수는 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정답이 없죠. 다 달라요. 자기만의 방식이 있는 거죠. 제가 아직 연기를 오래하지 않아서 ‘연기란 이런 것이다’고 정의하기는 좀 그래요. 하지만 연기는 계속 전진하는 것이고, 진화하는 거라는 건 알아요.”

고수는 이공진처럼 말하고 있었다.